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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 에도 시대의 마비키 이야기

lattehigh 2024.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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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 에도 시대에 만연했던 충격적인 문화, 마비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풍습들이 존재하죠. 특히, 일본에는 오늘날까지도 숨기고 싶어하는 악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마비키는 특히나 충격적인 문화로, 일본인들이 숨기고 싶어했던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일본 문화] 에도 시대의 마비키 이야기

에도 시대의 배경과 마비키의 탄생

일본은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20세기 이전 가장 풍요로운 시기인 에도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목욕 문화와 시장의 발달로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고, 인구도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에도 시대 중반 이후, 일본의 인구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에도 시대에 만연했던 문제점들 때문이었습니다.

에도 시대의 빈부격차와 잔혹한 신분 제도

에도 시대는 풍요로웠지만, 그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신분 제도의 잔혹함이 존재했습니다. 무사와 같은 지배 계층은 상인과 농민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세금 부담으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결국 마비키라는 잔혹한 악습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마비키: 아이를 하늘로 보내는 잔혹한 선택

마비키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주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력이 없는 신생아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자녀가 3명 이상이거나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주로 시행되었습니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자녀가 3명 이상인 가정이 드물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매년 마비키로 인해 약 4만 명의 아이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마비키가 가능했던 이유

일본인들이 마비키를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에게 아이를 돌려보내는 행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를 코가의 시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관념 덕분에 일본인들은 죄책감 없이 마비키를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일본 사회는 효를 중시하는 문화였으며,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겼기 때문에 아이의 생사 여부를 부모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변화와 마비키의 잔재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며 마비키와 같은 악습을 금지하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 동안 이어져 온 풍습이 단숨에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1930년대까지도 마비키가 지속되었고, 작은 마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마비키가 존재했습니다.

마비키의 잔재: 이지메

마비키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일본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집단 따돌림, 즉 이지메를 들 수 있습니다. 이지메는 단순한 학교폭력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벌어지는 악습으로, 마비키와 비슷한 맥락에서 약자를 배제하는 문화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일본의 충격적인 악습, 마비키

오늘은 에도 시대에 만연했던 충격적인 악습, 마비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마비키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풍습들이 많으며, 그중에서도 마비키는 일본의 역사적 배경과 연결된 충격적인 악습 중 하나였습니다. 이번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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